오성면 숙성리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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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 강제공출 거점지로 활용돼 번성
70년대 이후 교통발달 하면서 쇄락

   
▲ 숙성리대조두

소를 잡아먹는 이무기가 살았다는 소우물

숙성리는 오성면의 중심마을이다. 이 마을은 면사무소와 우체국, 파출소를 비롯하여 학교,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면(面) 내의 행정과 치안, 교육,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숙성리가 오성면의 중심이 된 것은 38번 국도의 가설 그리고 오성들의 개간과 관련이 깊다. 국도의 가설은 양교리에 있던 행정의 중심을 숙성리로 옮겨 놓았으며 나중에는 백봉리의 경찰지서까지 이동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산과 들판이 조화를 이룬 숙성리 일대에는 지명이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바다와 가까웠던 인연으로 이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정현진(75)씨 등에 따르면 숙성리 대조두 마을은 물위에 뜬 배의 형국이라고 한다. 바다가 가깝고 지대가 낮은 평택지방에서 배나 연꽃과 관련된 지형은 흔한 편이지만 숙성리도 그와 관련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배의 형국이면 함부로 샘을 팔수도, 나무를 벨 수도 없도록 하는 금기가 정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마을 주민 안흥식(75)씨에게 물었더니 그런 금기는 없었다고 하였다. 대조두 마을회관 옆에는 수령 600년을 자랑하는 회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나무는 옛날 바닷물이 밀려들 때 뱃줄을 매던 곳이라고 한다.

오래된 거목이 마을을 지키고 있으면서 주민들은 나무의 신령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무가 푸르면 마을이 잘 된다는 믿음도 생겼고 시들하면 흉한 일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신령한 회나무가 마을회관 옆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길을 크게 확장하면서 부득이하게 생긴 일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신령한 나무와 토지신이 노할까봐 노심초사하였다. 그래서 몇 백 만원을 주고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서 굿을 했고, 옮긴 나무에 막걸리 몇 말을 부어 힘을 북돋워주었다.

대조두 마을 동남쪽에는 ‘소우물’이 있었다. 면적이 약 5백 평쯤 되었던 이곳은 물구멍이 많이 있어 수심이 깊고 수량이 풍부했다. 소우물은 들판에 물을 대는 보(堡)였지만 여름에는 아이들이 물놀이 하는 피서지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소우물을 무척 무서워했다. 예로부터 소를 잡아먹는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정현진씨 등은 실제로 소는 잡아먹히고 코뚜레만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봤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이무기도 봤냐고 물었더니 그건 보지 못했다며 허허 웃었다. 소우물은 1970년대 경지정리 전에 없어졌다. 임자가 보를 메우고 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숙성1리원숙성마을거리(2007)

구루목쟁이는 대조두에서 안중으로 나가는 고개입구다. 지금은 많이 낮아졌지만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이 고개는 도깨비가 자주 출몰하던 곳으로 소문났었다. 사람들은 안중장을 보러 다닐 때 이 고개를 넘나들었는데 일을 보고 밤늦게 올라치면 도깨비가 나와 홀리는 바람에 혼비백산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 것이다. 들판에는 노인들도 유래를 잘 모르는 쇠똥배미나 개똥배미도 있었다. 거름이 귀하던 시절 쇠똥이나 개똥으로 거름을 주던 곳으로 판단되는데 자세한 건 좀 더 살펴봐야 할 것이다.

간척사업이 세상을 변화시키다

오성면 일대의 현재 모습은 간척사업이 만들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일제 말부터 한국전쟁 후까지 계속된 간척사업은 오성들 일대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간척 이전만 해도 오성들 일대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불모의 땅이었다. 조수가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것은 기본이었고 수해와 염해는 매년 연례행사와도 같았다. 그래서 생긴 말이 ‘두만강’이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수해 때마다 물바다가 되곤 하였던 오성면사무소 앞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일제강점기 오성들은 상당 수 간척이 안 된 상태였다. 설령 간척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제방이 약해서 조그만 수해에도 견디지 못했다. 이 땅을 조선 후기에는 왕족이나 권세가들이 농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개간하였다. 그리고 개간된 땅들의 대부분이 일본인 지주나, 친일지주, 동척농장의 소유로 수용되었다. 물줄기의 변화도 심하였다. 숙성리 남쪽의 안성천은 여러 갈래로 흘렀고 큰 비가 내려 홍수라도 휩쓸면 하룻밤 사이에도 물줄기가 바뀌었다. 정우진씨에 따르면 해방 전에는 도두리들이 오성면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 땅을 일제 말에는 길본이라는 일본인이 간척을 하였는데 동네 주민들에게 도급제로 일을 맡긴 뒤 임금을 지불하였다. 마침 소화 14년(1939)에는 초유의 흉년이 들어서 길본은 적은 임금으로 농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주민들의 저항 없이 일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해방 후 숙성리에는 시장이 개설되었다.

시장 개설은 일제 말 강제공출과 관련이 깊다. 강제공출 때 각 마을에서 거둬들인 공출미를 숙성1리에 쌓아두면서 자연스레 미곡의 매매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곡시장에 개설되자 주변으로 잡화전과 채소전, 어물전 등이 들어섰고 이것이 5일장으로 발전하였다. 시장 개시일은 2일과 7일이었다. 그래서 장날이 되면 고덕과 오성, 청북 일대의 농민들이나 상인들이 숙성리로 모여들었고 장터의 점방과 천막 아래에서는 장꾼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시끌벅적하였다. 날로 번성하던 숙성장은 1970, 80년대 교통이 발달하면서 기능을 상실해갔다. 

   
▲ 숙성리대조두회나무

세상이 변하면 공동체 문화도 변한다

숙성리에는 사라진 공동체 문화가 많다. 그것은 이농현상으로 농촌공동체가 흔들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필요성이 적어지면서 없어진 것들도 많다. 숙성리에 남아 있는 공동체 문화로는 당제와 두레를 들 수 있다. 당제를 거행했던 마을로는 원숙성을 포함하여 대조두와 소조두 등 대부분의 마을이 지냈다.

 숙성리 당제는 정월에 지냈다. 당숲은 오성중학교 뒤에 있는 참나무와 엄나무 군락이었다. 제물은 소머리였으며 제의 순서는 다른 마을과 대동소이했다. 대조두 당제는 마을 뒤 당산에 있었다. 당목은 참나무 두 그루였는데 당숲이 남아 있을 때는 숲을 이루었다. 당제는 10월 상달(보름 이전)에 지냈고 제물은 처음엔 소를 잡아 올리다가 나중에는 돼지머리를 올렸다.

제사 날이 잡히고 제주가 뽑히면 마을 입구와 당산에 금줄을 치고 금기를 지켰다. 정현진(75), 안흥식(73)씨 등에 따르면 당제가 중단된 것은 한국전쟁 직후라고 한다. 너무 이른 시기여서 원인을 물었더니 마을 주민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뒤로 당목은 벼락을 맞아 부러지는 수난을 당했다. 옛날 같으면 아무리 벼락 맞았다고 해도 쉽게 범접하지 못했을 터인데 기독교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를 가져다가 땔감으로 썼다고 한다. 하나님이 민간신앙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나 할까? 

 

   
▲ 숙성리소조두당집

소조두 당제는 여느 마을처럼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 사이에 좋은 날을 잡아 거행되었다. 그 해에 흠 없고 정결한 사람을 뽑아 제주(祭主)를 삼는 것도 동일했고, 날짜가 잡히면 마을 입구부터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다스렸다. 당숲과 당목, 당집 둘레에도 금줄을 쳤다. 제물은 평택지방에서는 돼지를 잡거나 소를 잡아 올렸는데, 이 마을은 소를 잡았다. 하지만 당제의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고 마을 공동기금 걷기도 어렵게 되면서 값이 싼 소머리로 바뀌었다. 제를 거행할 때는 무당을 부르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축문을 써서 읽었으며, 한지에 마을 남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서 소지를 올렸다.

   
▲ 숙성리원숙성(2004)

옛날에는 제사음식을 똑 같이 나누었지만 지금은 다음날 마을 회관에서 마을 잔치를 연다. 정성껏 섬겨지던 소조두 당제도 언제부턴가 중단되었다. 하지만 김교일씨 안내로 올라가 본 당숲과 당집은 여전히 건재하여 산신령께서 불쑥 튀어나와 ‘어서오너라!’라고 소리칠 것 같다.

 김해규 한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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