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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탑고개의 유래가 된 석탑부재 | |
마을 구성은
탑고개
원당거
길마원
자식들
까막눈 면하게
해주려고
강습소도 보내
■ 당집이 있던 마을 당거리
당거리는 안성천 변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그래서 옛부터 어업과 농업이 성했던 마을이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직산현과 수원부의 경계였다. 경계지점은 이웃한 숙성리 숙신대 마을이다.
그러던 것이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원군 지역이 되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는 안원, 안두원, 동원, 탑현이 통합되어 당거리라 해서 진위군 오성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의 구성은 탑고개(1리), 원당거(2리), 길마원(3리)이다. 1914년 당시만 해도 있었던 안두원과 안원 마을은 해방 후 안성천의 침식작용으로 수몰되었다.
당거리라는 지명은 원당거리의 큰 당집에서 유래되었다. 전해오는 말로 이 당집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정월 보름께면 당제사가 거행된다.
지명은 원당거에서 비롯되었지만 실제 당거리의 중심 마을은 탑고개(탑현)다.
탑고개는 본래 침식으로 수몰되어 지금은 도두리벌의 일부가 되어버린 안성천 건너에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마을 규모가 80여 호가 넘어 주변에서 가장 큰 동네였다.
탑고개라는 지명은 지금도 마을 회관 팽나무 옆에 일부 남아 있는 석탑(石塔)에서 유래되었다.
이 마을은 본래 “8 무당 촌”이라고 불릴만큼 무당들이 많이 살았다.
회관 옆에 사는 최원규(66세)씨에 따르면 마을 서낭당 아래에는 당골네라고 해서 큰 무당이 살았고, 회관 앞과 옆, 뒤쪽에도 살았다고 한다.
석탑은 회관 서쪽에 사는 무당이 섬겼다고 하는데, 평택시사에는 이 무당이 ‘탑신령’이라고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거3리 길마원은 오성들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어 교포3리 똘건너, 숙성리 숙신대 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나는 얼마 전 평택지방 천주교회사를 정리하면서 과거 이 마을이 ‘천주교 교우촌’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서 답사도 자연스럽게 교우촌의 실제에 대한 탐문으로 시작되었다.
마을을 답사하다보니 천주교 강당도 있고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도 신자들이어서 나의 주장은 사실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아닐 가능성이 많다“로 결론지었다. 마을 주민 이옥영(74)씨에 따르면 길마원은 본래 수성 최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천주교를 처음 받아들인 사람들도 최씨 집안의 두 가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점점 교우 수가 증가하고 강당까지 세워졌지만 천주교 박해로 피신한 사람들의 마을은 결단코 아니라고 하였다.
■ 길마와 가래로 간척한 마을 길마원
길마원은 마을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오성들의 간척과 함께 만들어진 마을이다.
농지가 많이 확보되다보니 살 길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도 많아서 마을 규모도 순식간에 60여 호로 불어났다.
초기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은 황무지로 펼쳐진 오성갯벌을 간척했다. 하지만 갯벌의 간척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평택호 주변의 경지개간과 경관(1990)”이라는 논문을 쓴 범선규씨에 따르면 1930년대 평원농장이나 길본농장이 오성들을 개간하기 전 이 지역의 개간방법은 냇뚝개간이나 제뚝, 또는 “원”을 쌓는 방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원은 규모가 작은 제방을 쌓아 간척하는 방법이었는데, 자금과 도구, 인력이 부족했던 길마원의 민중들은 가래나 소에 길마를 지워 ‘원’을 쌓는 방법으로 경지를 개간하였다.
그래서 생겨난 지명이 ‘길마원’, ‘안두원’, ‘안원’, ‘아홉가래원’, ‘세가래원’이다. 간척이 완성되면 농민들은 논에 물을 가둬두었다.
염기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2, 3년 그렇게 한 뒤에는 토박한 농지에서도 잘 자라는 보리나 메밀을 심었고 그 뒤에야 벼를 심었다.
교포리 편에서도 말했지만 해방 후 오성들의 가장 큰 재앙은 농지의 침식이었다.
농지침식 말고도 8월 백중사리의 염해나 장마철이나 늦여름 태풍에 의한 침수도 한 해 농사를 접을 만한 피해였지만 농지침식만은 못했다.
농지침식은 조금 때는 하루에 2, 3미터였지만 사리 때는 10미터 20미터씩 파고들었다.
탑고개 김기식(80)씨는 심할 때는 70미터가까이 파먹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하여 나를 놀라게 하였다.
침식은 마을 앞의 광활한 농지를 순식간에 먹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나무기둥과 대나무를 세우고 1미터가 넘는 제방을 쌓았지만 침식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1960년대 쯤에는 길마원이나, 교포로 똘거너는 마을을 옮기려고 보따리까지 쌓는 일까지 있었고, 농지를 상실한 사람들은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 일본인의 농장경영
오성들의 개간을 획기적으로 바꾼 사람은 일본인 평원(平原)과 길본(吉本)이었다.
평원과 길본은 일본인이라는 이점을 살려 총독부로부터 간석지의 황무지 개간권을 허락받아 대규모 제방을 쌓고 농경지를 확대하였다.
하지만 속터지는 일은 일본인들이 개간하기 전부터 이 땅은 농민들이 피땀흘려 개간한 농지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총독부는 농민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부도난 주식과도 같은 식민지 백성의 처지였다.
당거리 탑고개 마을과 수몰된 안두원 주변의 농지를 개간한 것은 길본이었다.
그 넓이는 오늘날 팽성읍 도두리들의 60~70%가 넘는 규모였다.
나는 평소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지주의 농장 경영에 대하여 알고 싶었던 터라 김기식(80)씨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김기식씨는 조선인 지주에 비하여 일본인 지주의 농장경영은 한 단계 진보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길본은 1930년대 초 오성들에 농장을 마련한 평원보다 근대적 방법으로 농장을 경영하였다.
예컨대 평원은 전근대적 경영방식인 마름을 통한 농민지배와 타작감독관을 통한 소작료 징수를 실시하였지만, 길본은 탑고개 서쪽 정수장 부근에 농장사무실을 차리고 관리인을 고용하여 체계적으로 농장경영을 하였다.
소작료는 반수제였고, 비료대와 수리조합비, 인건비 등도 절반씩 나눠 부담하였다.
이렇게 거둬들인 쌀은 수로와 육로를 통하여 평택역으로 운송되었고,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당거리를 쓰면서 지면을 통하여 사과할 일이 하나 있다.
앞서 썼던 교포리에 관한 내용에서 ‘일제 말 전시체제 하에서 소작농들은 강제공출을 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른 것이었다.
소작농들도 지주처럼 강제공출을 당하였다. 이것은 당거리의 소작농들도 마찬가지였다.
김기식씨도 일제 말에는 강제공출과 가마니 공출로 고통당했던 일을 증언했는데, 이것이 사실이다.
광활한 오성들의 일본인 농장은 해방되면서 적산농지로 귀속되었다.
해방 후 적산농지는 일반적으로 사유지보다 이른 시기에 농민에게 불하되었다.
농민들은 자기 농토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로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 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앞서 말했던 농지침식 때문이다. 아무리 침식이 심했기로 소유 농지를 모두 잃었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직접 탑고개 마을 회관 마당에 서 보시라.
■ 일제강점기의 배움터 숙성강습소
당거리 답사에서 얻은 소득에서 가장 큰 것은 일제강점기의 지방 교육에 관한 내용이다.
1930, 40년대 오성면에는 정규학교로 안중초등학교(국민학교)가 있었고, 숙성리에는 분교 격인 2년제 간이학교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간이학교는 2년을 수료한 후 안중초등학교에 편입하여 다녀야 했기 때문에 ‘녹두밭 윗머리(가뭄으로 벼를 심지 못해서 녹두나 메밀을 심었다는 말)’라고 할 만큼 가난했던 오성면 농민들로서는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강습소를 다녔다.
강습소는 정규인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교과내용이 일반학교와 별 차이가 없었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자식들 까막눈이나 면하게 해 주려고 학교에 보냈기 때문에 현실과도 잘 맞았다.
숙성강습소는 오성중학교 뒤 지금은 연립이 들어선 곳에 있었다.
비록 정규학교는 아니었지만 교실 3칸에 교무실 1칸 그리고 운동장을 갖춘 규모 있는 학교였다.
학생 수도 2백 여 명이나 되어서 일반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이 학교를 세운 사람은 서병창씨였다.
이 분은 숙성리 출신의 지식인으로 한국전쟁 당시 우익들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봐서 일제 말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교사는 서병창씨 외에도 이용목이라는 분도 계셨고, 간혹 서병창씨 부인도 교사를 담당하였다.
6개 학년에 교실 3칸 그리고 교사 2명의 미니학교이다 보니 어려움도 많았다.
학생들은 2개 학년씩 묶어 3반으로 구성하였고, 선생님들은 이 교실 저 교실을 옮겨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교과목은 일반학교와 같았다. 그래서 “민족의식을 가진 분이 세운 학교인데 일반학교와 같았겠어요?”하고 말했더니,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어”라고 응수하신다.
돌아오면서 탑고개 서낭당을 답사했다.
서낭은 당집은 없어지고 몇 백 년 된 엄나무만 홀로 남아 있다.
1980년대 초만해도 서낭당 아래에 만신이 살아서 날마다 치성을 드렸고, 마을 사람들도 정월이면 소를 잡아 성대한 대동제를 올렸던 신성지역인데 이제는 주변도 어지럽고 당목도 싹을 돋우지 못한다.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인간 사회의 무정함을 함께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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